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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Bohm

2008. 6. 5. 00:34 | Posted by Arge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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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rl Böhm , 1981.8.14 ~ 1894.8.28 )

 
뵘의 음악은 한마디로 “정확함”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빈 국립가극장의 수석연출가를 지내고 음악평론가로 유명했던 마르첼 프라비(Marcel Prawy)가 “뵘은 정확하게 지휘한다”라고 말한 것, 뵘 스스로가 죽기 몇 주 전 “어려움도 많았지만, 나는 항상 음악에서는 정직하고 고귀했다”고 회상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뵘 음악에서 나타나는 이 “정확함”은 그의 음악에의 순수한 열정에서 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뵘이 만드는 음악은 순수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뵘의 음악은 실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흔들림 없는 진행과 힘, 그 속에 내재된 겉치레 없는 소박함과 깔끔함으로 묘사할 수 있다. 뵘의 음악 스타일은 정확하고 엄격하면서 한편으로 소박한, 그러나 작품전체의 조형이 잘 구성된, 그래서 한편으로 냉철하게 느껴진다. 낭만주의의 과도한 감상에서 벗어나 세련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전통을 따르는 그야말로 독일음악의 맥을 잇는 지휘자이다.

이러한 뵘의 음악 스타일은 빈 고전파의 전통을 최고로 지향했던, 그의 음악관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뵘의 레퍼토리는 많은 수가 고전주의 음악에 맞추어져 있다. 특히 뵘은 모차르트를 이상적인 존재로 생각했는데, 평소 말수가 많지 않은 그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수차례의 저술과 대담을 통해 열변을 토하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바르게 해석하고 알리고자 하였다.

뵘은 그라츠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음악을 공부했다. 그는 1913-14년 그의 고향에서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Eusebius Mandyczewsky)에게, 빈에서 귀도 아들러(Guido Adler)에게 사사받았다. 빈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라츠 오페라에서 가수들을 지도하였는데 1917년 네슬러(Viktor e. Nessler)의 《제킹겐의 나팔수》(Der Trompeter von Säckingen)로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그는 그 후 당대의 주요 작품을 연구하고 지휘하였으며, 특히 카를 무크(Carl Muck)와 브루노 발터(Bruno Walter)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크는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 총보를 가르쳤고, 브루노 발터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Staatsoper)으로 뵘을 초대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뵘은 1921년 뮌헨으로 옮겼다. 그는 뮌헨에서 6년 동안 지낸 후 1927년 다름슈타트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여기서 그는 현대 오페라를 상연하였는데, 여기에는 《보체크》가 포함되어 있다. 뵘은 1933년은 처음으로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 음악적 발전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시기였다.

뵘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의 최초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동등한 수준의 성공은 드레스덴에서의 데뷔일 것이다. 뵘은 스스로가 “지휘자로서 드레스덴에서 활동한 몇 년 간은 나의 성장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기간이었다. 드레스덴의 가극장과 그 음향 효과, 그리고 슈타츠카펠레가 나에게 준 인상은 정말 강렬했다”고 회고한다. 뵘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도 유명한데, 뵘은 슈트라우스의 2개의 오페라 《말 없는 여인》과 《다프네》를 초연하였다고 한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를 맡았던 두 번의 기간(1943-5, 1954-6), 그리고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ón)에서의 예술적 공헌, 빈 국립극장에서 1955년의 《피델리오》, 마지막으로 1956년 이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잘츠부르크, 바이로이트, 빈,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밀라노, 파리와 뉴욕에서 정기적으로 지휘를 하였다. 1957년 《돈 조반니》로 메트로폴리탄에서 데뷔를 하였다. 뵘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전곡과 《코지 판 투테》의 3개의 버전을 포함하여 그가 좋아하는 작곡가들의 주요 작품 대부분을 녹음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었고, 빈 필하모닉의 ‘존경받는 지휘자’와 오스트리아의 지휘자라는 두 개의 유일한 타이틀을 얻었다. 뵘은 독일 후기낭만주의 음악의 정통적 적자라고 판단되는 지휘자에게 계승되는 ‘아르투르 니키쉬 링(Arthur Nikisch Ring)’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뵘의 음악은 드레스덴 시대부터 전혀 과장이나 왜곡, 허세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뵘의 엄격히 기능적인 제스처로의 표현을 보이는 음악적 접근은 솔직, 신선, 정력적이고 권위적이다. 낭만주의 감상주의나 자기연민의 비르투오조 매너리즘을 피한 것은, 《트리스탄》과 《링》의 바이로이트 녹음에서 잘 보여준다. 그는 그의 능숙한 균형과 소리의 혼합, 안정된 빠르기, 극적인 긴장은 존경받을 만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녹음에 대해 “완성이 아니라 맥박이 고동치는 생명을 내 녹음의 특징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뵘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그의 예술을 성숙시킨 19세기의 마지막 거장이 아니었을까.


출처 :http://classicno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