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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backhaus

2008. 6. 5. 00:46 | Posted by Arge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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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lhelm backhaus , 1969.7.5 ~ 1884.3.26 )



바크하우스의 인생은 피아니스트 그 자체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60여년의 피아니스트 인생을 전 세계를 누비며 연주를 해 오면서 그의 인생을 콘서트 피아니스트라는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설계한 음악가였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제자를 키울 시간이나 여유도 흥미도 없었던 것, 그리고 교직에 몸담은 시간이 짧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1905년 멘체스터 왕립 음악학교, 1907년 존더스하우젠 음악원, 1925년과 다음해 겨울 학기에 커티스 음악원에서 각각 가르친 것이 그가 교직에 있었던 전부이다. 그리고 바크하우스의 제자로 띄어나 연주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연주가로서만 살면서 연주를 해 온 그는 1966년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연주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명예 십자훈장을 서훈받기도 했다. 그의 사진을 보면, 그의 오른손 약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반지는 연주가로서의 영예를 상징하는 것으로, 오스트리아의 뵈젠도르퍼 피아노 회사가 다이아몬드를 박아 증정한 반지로, 금세기 최대의 피아니스트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피아니스트의 삶은 사실 그의 출생에서도 흥미롭다. 빌헬름 바크하우스는 1884년 3월 26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1884년은 스메타나가 타계한 해이며, 피아니스트 레오니트 크로이처가 태어난 해이다. 또 그의 탄생 전년도인 83년은 앙세르메가 그리고 그 다음해인 85년은 클렘페러가 태어난 해이다.

바크하우스는 일곱 살 때부터 8년 동안 라이프치히에서 알로이스 레켄도르프(Alois Rechendorf)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레켄도르프는 비록 연주가로서 후세에 이름을 남길 만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바크하우스에게 엄격한 피아노 기초교육을 가르치고 독일 피아노 음악의 전통을 전수해 지금의 바크하우스를 남긴 사람이다. 즉, 바크하우스가 오늘날 완벽한 피아노 기량의 소유자라 평가되는 것은 이 레켄도르프의 완벽주의적인 기초교육의 성과가 아닐까.

바크하우스의 피아노 기초를 만들어 준 것이 레켄도르프라면 바크하우스를 빛날 수 있게 세공시킨 것은 프랑크프르트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 달베르(Eugène d'Albert)이다. 달베르는 특히 베토벤 연주가로서 널리 명성을 날린 인물인데, 바크하우스는 달베르에게 베토벤 음악 해석을 공부하면서 테크닉의 완성을 이루었다.

1900년 바크하우스는 런던으로 처음 연주여행을 떠나 성공을 거둠으로써 피아니스트로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니키슈가 지휘하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독주자로 발탁되어 화려한 데뷔를 했다. 바크하우스는 니키슈를 시작으로 당대의 수많은 명지휘자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는데, 한스 리히터는 바크하우스를 높이 평가한 대표적인 지휘자이다. 리히터와 바크하우스의 밀접한 관계는 1903년 런던에서 리히터의 지휘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을 협연하기로 한 피아니스트가 출연할 수 없게 되자, 이의 대역으로 바크하우스가 뽑힌 것이 동기가 되었다. 이 때 바크하우스의 연주를 마음에 들어 했던 리히터는 그 후 자주 바크하우스와 협연했다.

바크하우스는 세계 여러 곳의 음악제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레코딩에도 적극적이었다. SP 시대에서 모노와 스테레오 LP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피아노선율을 남긴 수많은 명반들이 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사상 최초로 피아노 협주곡 레코딩을 한 것도 바크하우스인데, 1910년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의 레코딩이 바로 그것이다.

베토벤 탄생 200주년인 1970년 의욕적인 연주 활동을 세워두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전년도에 그는 타계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마저도 “그 답다”라는 생각이 든다. 1969년 6월 29일 오스트리아의 그라젠펠트에서 베토벤 연주를 했던 그는 연주회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곧 호텔로 옮겨졌다. 그러나 다시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7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비록 1970년의 그의 계획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존경했던 베토벤과 함께, 그리고 끝까지 피아니스트로써의 삶을 살았던 연주가였다.

“건반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졌던 박하우의 강인한 연주와 예리한 분석력은 그의 음반을 접하는 이들에게 작품에 대한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가 비록 직접 제자를 키우지는 않았지만, 그가 남긴 음반은 지금의 피아니스트들에게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음악 작품에 대한 분석력과 어디에도 편중되지 않는 올곧음, 마지막으로 하나의 표현에만 얽매이지 않았던 유연성 때문이 아닐까.

그는 연습을 많이 한 피아니스트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반을 만지지 않을 때는 음악 공부를 하고, 콘서트가 있을 때는 공연 작품만을 생각하면서 음악과 완벽한 일치를 이룬 음악가였다;


“콘서트 며칠 전에 나는 공연 작품만을 생각합니다. 나는 그 공연을 언제나 생각하였고, 그것에 전념하였습니다. 어느 것도 나에게서 그것을 떼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대화도 없었고, 책도 읽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과 이야기 하고 있는 순간에도 Haydn의 《E♭ 소나타》를 연습하고 있는 내 손가락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운지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내가 의미하는 끊임없는 연습입니다. 그것은 사실 몰입입니다.”


출처 : http://classicno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