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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Sophie Mutter

2008. 6. 6. 16:04 | Posted by Arge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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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독일 남서부 라인 강변의 라인페르덴에서 태어난 안네-소피 무터는 현재 정경화와 더불어 세계 여류 바이올리니스트계를 이끌고 있는 거물급 연주자이다. 다섯살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나 몇 개월 뒤 바이올린으로 관심이 옮겨져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바이올린 렛슨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터의 최초의 렛슨 선생은 유명한 카를 플레슈의 제자인 에르나 호니히베르거였다. 그는 무터의 재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그녀의 천재성에 빗대어 "멀지않은 장래에 분명히 그녀는 카라얀과 협연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바 있었는데 이는 결국 그녀의 나이 13세 때 그대로 현실화 되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무터는 자신의 위대한 첫 스승이었던 호니히베르거로부터 배운지 불과 몇개월 만에 7세의 나이로 1979년도 전독일 청소년 음악 콩쿠르에 출전, 우승을 따내며 자신의 남다른 재능을 일찍부터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1976년 여름 스위스의 루체른에서 피아니스트인 오빠 크리스토퍼 무터와 함께 듀엣을 연주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소식이 급기야 베를린의 카라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카라얀은 이 13살 짜리 꼬마숙녀를 직접 자신의 오디션에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단원들 앞에서 연주한 곡목은 바흐의 '샤콘느',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음악성에 반한 카라얀은 다시 모차르트 '협주곡 D장조'의 느린 악장을 청했고 즉각 그녀를 베를린 필의 정식 솔리스트로 채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뒤인 1977년, 잘츠부르크 성령강림제 페스티벌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눈부신 커리어의 행보를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솔리스트와 체임버 뮤지션으로 인기를 누리면서 종횡무진 유럽,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이 이끄는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무대를 가졌으며, 세계 대형 페스티벌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빈 페스티벌, 루체른 페스티벌에 고정 초청연주자로 참가하기도 했다.

고전과 낭만을 비롯해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무터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작곡한 비톨드 루토스와브스키, 크지슈토프 펜데레츠키, 볼프강 림 등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했다. 무터는 87년 젊고 재능있는 유럽의 현악연주자들을 후원할 목적으로 루돌프 에벌르 인도우먼트를 설립했으며, 뮌헨에 근거를 두고 있는 안네 소피 무터 재단과 97년 설립된 프레즈 서클도 같은 목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국제 바이올린 연주회 회장직을 맡기도 한 무터는 영국 런던 로얄 음악 아카데미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왔으며, 독일 연방 공화국 메리트 훈장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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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지겨운 공연을 하느니 차라리 틀리게 연주하는 것을 택하겠다"

런던 타임즈지는 "안네 소피 무터는 이 시대 최고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그녀는 백만불짜리 음악적 두뇌를 가지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음악평론가 리차드 모리슨이 쓴 이 글은 2년 여의 침체기를 이제 막 벗어나고 있는 무터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차크 펄만을 생각해 보면 그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1980년,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뉴스 위크지가 36살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이차크 펄만을 커버 인물로 내세우면 서 '톱 피들' (Top Fiddle) 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후 펄만은 오늘날까지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모리슨과의 인터뷰에서 무터는 "나는 요즘 모든 연주회에서 모험을 한다. 그것은 발가벗은 내모습 그대로다. 일반적으로 안전한,그리고 반복되는 지겨운 공연을 하느니 차라리 틀리게 연주하는 것을 택하겠다"라고 말했다.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 원천은 바로 현대 음악이다.
그녀의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과거 카라얀으로부터 영향받은 '예술적 자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최근 무터는 "카라얀은 나를 벼랑 끝까지 내몰아서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시각이 아닌,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넓은 시야를 갖게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이후 무터는 "더 이상 악보의 일부가 아닌 진짜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 연주가에게 그것은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녀가 요즘 연주에서 신들린 것 같은 빠른 스피드를 택하고, 스스로 그를 즐기고 있는 것은 그 일면을 보여주는 가지 않는 한 벼랑 끝까지 몰고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녀의 이러한 신세대적 사고는 외모에서부터 강하게 풍긴다 하다 할만큼 짙은 화장, 매혹적인 포즈, 가슴과 등을 과감하게 노출시킨 어깨끈 없는 크리스찬 디올, 금발의 긴 머리카락… 무대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패션 모델과 다를 바가 없다. 무터는 항상 이렇듯 화려한 의상을 입고 청중들과 만나고 있고, 데이컬타즈는 이미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첼리스트 오프라 하노이와 더불어 '연주하는 패션모델'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9년만에 성숙한 서른살 여인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선다. 9월 2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독주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커리어의 '시계 태엽', 브람스의 소나타 제 1번G장조, 모차르트 소나타 E단조 K.304,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제2번 D장조 등이 그녀가 이번에 들려줄 레퍼토리다. 카라얀 사후 그녀의 연주가 어떻게 변모했으며, 과연 모리스의 말대로 세계 제일의 여류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카라얀에게 발탁된 '세기의 재능'

63년 독일 남서부 라인 강변의 라인페르덴에서 태어난 무터가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한 것은 5살 때다. 아마튜어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신문 발행인인 아버지에 의해 조직적으로 길러진 무터는 6살때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리사이틀을 보고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린 무터가 칼 플레쉬의 제자인 호니히베르거라는 대스승을 만난 것도 그때 쯤이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무터를 '세기의 재능'이라고 공표했고, 독일 정부는 그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덕에 무터는 보통의 의무교육 대신 바이올린 연주가로서의 특별 교육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이 '세기의 재능'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0년이다. 7살바기 무터는 전 독일 청소년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부문 우승과 함께 피아노 듀오 부문에서도 오빠인 크리스토프와 우승을 차지해 음악계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메뉴인 이후 '분더킨트'의 재롱을 목말라 하던 매니저먼트들의 연주회 개최 교섭이 쇄도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매우 현명했다. 그들은 딸의 재능을 결코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음악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용기를 줄 뿐 더 이상 공개 석상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대신 쉬트키에게 본격적이고도 정통적인 교육을 받게 했다. 7년간 계속된 이 19세기적 교수법은 그녀로 하여금 어떤 곡도 자유롭게 소화해 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무터가 무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6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였다. 피아니스트인 오빠와 2중주를 연주했는데, 거기에서 무터는 엄청난 행운을 잡는다. 13살 소녀에 불과했던 그녀에게 카라얀이라는 대가의 손길이 뻗친 것이다.
카라얀의 초빙으로 베를린 필의 오디션에 참가한 무터는 자신의 기량을 최고도로 발휘하며 바흐의 샤콘느를 연주했다. 그러자 카라얀은 예정에도 없는 모차르트의 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을 부탁한다. 느린 부분에서까지 충분히 음악성이 살아난 명연이었다. 순간 딱 벌어진 카라얀의 입에서는 "메뉴인 출현 이래 최고의 음악적 재능을 가진 신동"이란 찬사가 튀어나온다. 그것은 무터의 장래를 결정짓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카라얀은 즉각 7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에 그녀를 초빙해 베를린 필의 솔리스트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했다. 78년 2월에는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으로 베를린에서 데뷔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현대의 명연주가 중 모차르트·베토벤 ·브람스·브루흐 같은 독일 작곡가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탁월하게 연주하는 독일 연주가는 공교롭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라이슬러 ·쿨렌캄프의 뒤를 잇는 무터의 등장은 독일 음악계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바이올린의 작은 요정'으로 떠오른 무터에게 청중과 언론들은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카라얀의 제의로 베를린 필과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레코딩한 것도 바로 그해였다.
그러나 이 데뷔 레코딩을 내놓았을 때 독일 평론계는 일대 공방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콩쿠르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 혜성처럼 등장한 14살의 이 소녀를 "독일의 자존심이 낳은 제2의 모차르트"라고 치켜세웠다. 그런가 하면 "어디까지나 카라얀이라는 제왕의 뒷받침을 받은 무리한 등장" 이라는 반박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방은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불과 4~5년 사이에 그녀는 스케일이 장대하고 웅혼한 베토벤, 섬세하고도 감미로운 멘델스존과 브루흐를 섭렵하고, 브람스의 까다로운 관문을 지나 바흐의 전아한 전당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또한 그녀는 프랑크와 알반 베르크·프로코피예프 등 현대 작품에도 손을 대면서 10대에 이미 세계 바이올린계의 '무서운 아이'로 떠올랐다. 79년에 그녀가 독일 레코드업계에 의해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무터의 모차르트 연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통 독일 음악의 뿌리깊은 보수성 위에서 출발한 그녀는 명쾌한 템포, 신선한 음색, 리듬감 넘치는 연주로 모차르트의 작품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냈다. 그녀는 스무살을 넘기기 전에 아이작 스턴·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 이른바 모차르트의 명인들을 능가하는 연주를 들려주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무터가 단시일 내에 세계 정상의 자리를 넘보기까지는 카라얀이라는 음악계 제왕의 절대적인 후원이 뒤따른 것도 사실이다. 카라얀은 아직 10대의 앳된 소녀에 불과했던 그녀를 "무터는 지금 세계 3대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사람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제 1인자일지도 모른다"고 치켜세웠다. 그 말은 곧 전세계 음악계에 그대로 적용됐고, 무터는 일약 세계 제일의 스타로 부상했다.
그녀는 이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78년 베를린 데뷔 이후 유럽 음악계에 화제를 뿌리며 취리히·파리·잘츠부르크·뮌헨·빈·뉴욕·런던 등지에서 바렌보임·자발리쉬·부르고스·알프레히트·아바도·로스트로포비치·무티 등과 같은 거장들과의 협연무대를 통해 그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 나갔다. 레코딩에도 심혈을 기울여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베토벤·멘델스존·브루흐·브람스·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파울 자허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는 스트라빈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출반하여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무터는 클래식 음악가로서는 처음으로 독일 연방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현대곡 연주하며 레바인과 밀월시대 구가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무터는 카라얀 사후 89년 런던 심포니와 바르토크 협주곡 연주를 끝으로 잠시 휴면기를 갖는다. 한때 그녀는 카라얀·로스트로포비치와의 염문설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당시 그녀는 카라얀의 애를 낳는 사람이 쉽게 그의 마리오네트가 될 수 있다는 위험스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비록 카라얀의 아이를 낳지는 않았지만, 무터는 카라얀의 절대적인 후광 안에 있었고, 한때나마 카라얀을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정신적 지주였던 카라얀의 죽음은 그녀에게 분명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터가 카라얀의 전 변호사였던 데티프 분덜리히와 전격적인 결혼 발표를 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당시 무터는 26살이었고, 분덜리히는 52살의 중년이었다. 그러나 '의외의 사건'으로 불렸던 이 결혼은 무터의 새로운 출발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녀는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로 카라얀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이들은 현재 2살된 딸을 두고 있다.
무터가 본격적으로 연주무대에 복귀한 것은 90년대 후반이다. 그녀는 '무터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바로크기로부터 현대의 전위음악에 이르는 전시대의 음악을 선보이며 출발만큼이나 화려하게 재기했다. 특히 바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은 카라얀과 함께 8년 전부터 공부한 곡으로 최근 새롭게 레퍼토리에 넣음으로써 그녀의 방향전환 시도에 결정적인 역
할을 했다.
"15년 동안 나는 제한된 레퍼토리만을 되풀이해 왔다. 그럴 때 마다 어디에서 새로운 영감과 충격과 아이디어를 얻을 것인가 늘 고민했다. 현대음악은 나의 이런 고민을 해결해줬다. 거기에는 새로운 감동의 세계가 있다."
바르토크를 시작으로 무터는 지난해 여름부터 현대곡 연주에 잔뜩 열을 올리고 있다. 그녀의 연주가 다분히 모험적으로 바뀐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그녀의 연주에서 어려워하는 기색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현대음악이 제공하는 기술적인 도전이라든가 해석에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92년 6월 취리히에서 초연된 림의 '타임 찬트'를 작곡할 때의 일화는 이를 단적으로 얘기해 준다. 무터에게 헌정된 이 곡을 작곡할 때 림은 바이올린 솔로 파트를 도약이 심하게 설정해 놓고 무터에게 연주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그것은 보통의 연주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법적으로 난해했다. 그러나 그녀의 답변은 의외였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에서 어렵다고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당신의 생각대로 작곡하라. 내가 원하는 것은 음악적인 메시지이지 쉽고 어려움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카라얀과의 밀월시대를 끝내고 그녀가 최근 새롭게 만난 사람은 제임스 레바인이다. 이들 콤비는 불과 1년 사이에 바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을 비롯해서 볼프강 림의 '타임 찬트', 로베르 모레의 '꿈',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시카고 심포니와 녹음했고, 빈 필과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파퓰러 프로그램을 녹음했다.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귀여운 무키' 등 유아기적 애칭을 벗어던진 무터는 이제 30대의 성숙한 여인으로 제2의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녀의 연주세계도 바뀌어가고 있다. "현대음악이 없이는 나의 연주가로서의 생은 의미가 없다"며 현대음악 연주로 재기를 선언한 무터의 이번 내한 공연은 그래서 더욱 기대가 크다.
정경화가 선두주자, 손넨버그·뮬로바·무터 ·미도리로 이어져 알마 신틀러라는 여인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재원이라고 불러 어김없이 들어맞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의 남편이 된 구스타프 말러는 만일 자기와 결혼하게 된다면 그녀가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결국 알마 신틀러는 한 사람의 '교양있는' 내조자로 남는 데 만족해야 했다.
적어도 오늘날의 연주계, 특히 바이올린 연주계에 있어서는 그러한 부당한 대접이 눈에 띄게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 가당찮은 편견과 무시가 사라진 대신, 파가니니 이래 남성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바이올린에 확실한 우먼파워 선풍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이미 수년 전 타임지의 음악 편집자인 마이클 월시가 이미 예견한 바였다. 그는 스스로 꼽은 5명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빅토리아 뮬로바의 입을 빌려 이들, '현의 아마조네스'들이 얼마나 당차게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난 어떤 압박감이 작용할 때 연주를 더 잘합니다. 집중력이 더 강해지죠" 구 소련에서 망명한 뮬로바의 말이다.
20세기의 후반에 이르러 여류 바이올린 주자들이 본격적인 개화기를 향유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물론 선배 여류주자들로부터 나왔을 터이다. 레코딩이 남아 있는 한 에리카 모리니와 수잔느 라우텐바커, 그리고 느닷없는 비행기 사고로 인해 요절, 거의 신비의 기운이 감도는 지네트 느뵈, 칼 플레쉬의 제자였던 이다 헨델, 폴란드가 낳은 퍽 비범한 바이올리니스트
인 반다 빌코르미스카 등이 이들 선배 바이올리니스트에 해당된다.
그러나 진정한 진보의 첫발을 내딛은 인물은 우리의 정경화였다. 1967년의 레벤트리트 콩쿨 공동 우승 이래 그녀는 탁월한 업적을 차례로, 그리고 각 시대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고루 쌓아왔다. 어느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도 정경화만큼 다양한 레코딩을 내놓지 못했으며, 그녀만큼 깊이있게 음의 궤적을 추적하지도 못했다. 이제 4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그녀는 EMI로 자리를 옮겨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유년의 나이에 첫 레코딩을 내놓는 소위 '분더킨트(신동)'의 진영에서 출발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누구보다도 그녀의 입지는 단단하다. 그녀의 평판은 미국에서보다 런던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무대에서 더욱 확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학생치고 도로시 딜레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혈통을 지닌 미국인 나디아 살레르노 손넨버그와 일본인 가문에서 태어난 미도리가 바로 딜레이의 제자다. 이중 우리에게 특히 생소한 인물이 손넨버그이다. 그녀를 일컬어 '환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던 신문이 시카고 선 타임즈였다. 애버리 피셔상의 커리어 그랜트를 수상하고 나움버그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발판을 구축한 손넨버그는 EMI와 전속계약을 맺고 많은 레코딩을 계속해 왔다. 미국의 크고 작은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과 잘 닦여진 매니지먼트의 후광을 충분히 입었던 그녀는 미대륙의 음악 비즈니스 매커니즘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성공작인 셈이다. 강렬한 눈매와 다소 선정적인 연주복 차림새는 얼마쯤 안네 소퍼 무터와 닮아 있는 듯하다.
안네 소피 무터는 독일이 배출한 진정한 천재의 한사람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1963년생인 그녀는 15살의 나이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능란하게 연주, 카라얀을 휘어잡았던 전력을 갖고 있다. 대단히 매력적인 음색, 그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안정된 기교로 그녀는 정상권으로 진입하는 시간을 대폭 단축해갔다.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뮬로바가 채 손대지 않은 많은 레퍼토리가 이미 무터의 손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연주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반응은 매번 달라져요. 심지어 같은 레코딩을 되풀이해서 듣는다고 해도 반응은 달라집니다. 이것은 신에게 감사드릴 부문이지요. 왜냐하면 그래야만 진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베르크와 루토스와프스키,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협주곡까지 녹음해낸 무터의 얘기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만한 통찰력을 지닌 그녀는 이미 '프로'다. '프로'란 적어도 '천재아'의 수준에서 한걸음 이상 벗어난 성숙성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1978년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2위 입상자인 덜라나 젠슨은 분명 오늘의 미도리에 버금가는 천재아였다. 그녀의 데뷔 레코딩인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어본다면 그 비범한 천재성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느낄 터이다. 그러나 미국의 여류 젠슨은 성장이 이어지질 않았다. 멈춰버린 고성능 기관차처럼 젠슨의 성장정지는 많은 음악인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남았던 것이다.
젠슨의 케이스는 모든 천재아들에게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주빈 메타의 키스를 받을 때, 고토 미도리는 정말 어린아이였다. CBS가 발굴한 최대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 미도리가 성장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단 한 세대도 넘기기 전에 좌초할 것인가에 대해서 모든 음악 관계자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더 어린 나이에, 더 많은 것을 이룬 우리의 장영주도 마찬가지 경우다.
우리는 오늘의 바이올린 연주계에 성차별의 둑을 무너뜨린 5명의 연주자들을 계속 주시해야 한다. 그러나 더 많은 실력있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앙상블의 분야에서, 그리고 뭔전악기 연주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 마틴 인 더 필드의 이오나 브라운, 그리고 모니카 위게트 등의 이름은 이제 차라리 그 분야에서 '고전적인'것이 되었다. 모든 것은 균형이다. 그 균형의 틀에서 보다 매력적인 협주곡을 중심으로 한 콘서트 주자만이 더 사랑받을 뿐이다.



출처 : http://www.classical25.com/